외세에 39년 항거한 '강화 도성', 세계유산 가능할까? [배기동의 고고학 기행]

외세에 39년 항거한 '강화 도성', 세계유산 가능할까? [배기동의 고고학 기행]

외세에 39년 항거한 '강화 도성', 세계유산 가능할까? [배기동의 고고학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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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강화도 고려궁지 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강화도 고려궁지에서 내려본 강화읍내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통일신라 이후 한반도의 왕조들은 수백 년을 주기로 교체됐다. 외세 침입으로 격동의 순간을 맞으면서 사회가 통째로 흔들리는 경우도 있었다. 한때 고려의 수도였던 강도(江都), 오늘날 강화도가 바채권
로 외세 침입과 정치적 혼란이 빚어낸 고난의 왕조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현장이다. 신라시대에는 경주, 조선시대에는 한양(서울)이 항구적인 왕도였지만, 고려시대에는 개성과 강화가 차례로 수도 역할을 했다. 물론, 수도로서의 정치적·시간적 역할을 개성과 단순 비교할 순 없지만, 강도 역시 39년(1232~1270)이란 적지 않은 시간 고려의저축은행취업자금대출
왕도였다. 강화에 남아 있는 당시 유적들을 살펴보면, 제국을 꿈꾼 고려가 몽골군에 대항해 장기전을 펼치며 새 왕도를 조성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무엇이 지정학적으로 현명한 전략인지, 또 미래를 위한 지도자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역사 현장이기도 하다. 수시상환
인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의 점골 고인돌. 인천시 제공 역사의 다양한 장면을 간직한 강화 고고학자가 아니라도, 강화 부근리의 멋진 북방식 고인돌을 마주하면 깊은 인상을 받게 마련이다. 이런 큰 고인돌을 세웠다는 것은 선사시대범용공인인증서
이곳 인구가 상당했고 큰 정치 집단도 존재했다는 뜻이다. 최근 이곳에서 수습된 구석기시대 ‘전곡리안 스타일’ 주먹도끼는 일찍부터 선사인들이 한강 수계를 따라 이동하며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화도에서 수습된 전곡리안형 주먹도끼 고사장
또 강화 마니산은 고려시대 때부터 단군 성지로 여겨지는 곳이다. 조선 말 개항기에는 프랑스 해군이 외규장각 의궤를 약탈하는 등 외세 침탈이 가장 먼저 닿는 등 격동의 세월을 체험했다. 특히 ‘고려 왕도’로서의 강화도는 여느 섬과는 다르다. 한반도 내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우리 민족사의 장면들이 섬 곳곳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자동차 유지비 계산
시각물_강화도 지도 강화 천도의 처절한 장면들 경기 김포시 문수산성 옆을 지나는 길지 않은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염하(鹽河·인천 강화군-김포시 사이 강화해협)는 그저 작은 강같이 대출상환액
보인다. 양안에 드러난 개펄 사이로 누런 조수가 빠르게 흐르는 것을 보니, 배로 건너기에는 만만치 않아 보인다. 오늘날엔 다리(강화대교, 강화초지대교)로 쉽게 건널 수 있지만, 이 좁은 바다가 세계 최강 몽골군에게는 고비사막보다 더 멀었음직하다. 월곶돈대에서 바라본 북한 개부산상호저축은행대출
풍군 지역. 당시 고종(1192~1259)은 1232년 개성을 출발해 개풍의 승천부를 거쳐 강화도 동북쪽 승천포(昇天浦)로 건너왔다. 이 지역 바다 폭이 2㎞가 좀 안되니, 조수가 급하지 않은 때를 택했다면 어려운 도해는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날 승천포에는 고려의 천도를 기념하는 천도 기념공원이 조농협카드
성돼 있다. 현종(992~1031)도 거란 침입으로 멀리 전라도 나주까지 잠시 밀려간 적이 있다. 하지만, 강화 천도 당시에는 태조(왕건) 무덤까지 이장한 것을 보면, 애초에 ‘한시적 천도’가 아니라 난공불락의 강도에서 몽골이 지쳐 물러가기를 바랐을 것이다. 당시 천도 과정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극도로 혼란스럽고 처절한대학생학자금대출
순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피란을 반대하는 장군이 참살되고, 노약자들이 버려졌다. 무신정권 집권자 최우의 결단 아래 피란길에 오른 고종이 더 불쌍할까, 아니면 함께 가지 못해 뒤에 남겨져 울부짖는 백성들이 더 고통스러웠을까. 개경에 단청 화려한 기와집들을 버리고 떠났던 고관 대작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전쟁은 인간의 삶을 막다른 절벽으로 몰아넣는데, 몽골 병란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1916년 강화도 고려궁성을 조사한 지도. '고려궁지'는 대체 어디에? 다른 주장들이 있지만, 강화의 고려 궁성도 개경의 그것과 같이 삼중성(三重城·내성, 중성, 외성) 구조였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 견해다. 궁성의 외곽, 즉 강화도성의 경계를 이루는 중성의 경우 2010년 이후 수차례 발굴을 통해 △기단에 석축을 두른 토성이며 △전체 길이가 11.39㎞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산성 북문쪽에는 '북산'이 동서로 길게 뻗어 있다. 이 북산 중턱에 위치한 ‘고려궁지’는 1964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다. 조선시대 강화유수부와 외규장각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주요 관청이 있었다는 점에서, 당연히 이곳이 고려 궁성의 자리였을 것으로 여겨졌다. 복원된 외규장각의 모습. 고려궁지 내에 위치해 있다. 문제는 2000년대부터 도시개발 및 복원을 위한 발굴이 진행됐는데도, 막상 고려궁성의 실제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기록에 의하면 강도의 고려 궁성은 개성 만월대를 그대로 본떠 축조됐다고 한다. 그래서 학자들은 강화의 지형 중 개성 송악산과 화산에 해당하는 북산과 남산 사이를 궁성의 중심지로 보고 있다. 또 강도 북산(개성의 송악산) 사면에 궁성이 자리 잡고, △북산과 △동쪽의 견자산 △서쪽의 고려산 등 세 곳의 사이 어딘가에 도성의 중심시가지가 발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견자산 남서쪽 평탄지에도 대형 건물지가 있지만, 이것은 최우의 집, 즉 진양부(晉陽府)의 흔적일 가능성이 높다. 왕궁이 아닌, 당시 최고 권신의 사저였다는 것이다. 개경 왕궁의 배치를 참고해 볼 때, 현재의 '강화궁지' 아래쪽에 해당되는 읍내 ‘궁골’ 일대가 고려궁지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발굴을 통해 동지(東池)로 추정되는 유구, 그리고 정연하게 배열된 대형 회랑식 건물지들이 구제발굴(긴급 발굴조사)에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고려가 개성으로 환도하면서 강도의 궁궐을 허물었다고 하나, 읍내 시가지 지하 어딘가에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현재 건물이 빼곡히 들어차 있어서 본격적인 조사를 할 수 없으니, 고고학적 수수께끼로 남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고품질 비취색 상형 청자 조각. '강도 시대' 고려=해상 왕국 강도 시대의 고려 문화는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하다. 자랑스러운 세계유산, 팔만대장경이 대표적이다. 불법으로 극몽(克夢)하고자, 이곳 선원사에서 시작된 국가 사업이었다. 또 금속활자의 발전 역시 강도 시대에 이뤄진 주목할 만한 유산이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보다 무려 150년 앞서 ‘상정고금예문’이 강도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됐다는 기록이 있다. 관청리 건물지에서 출토된 각종 청자 접시. 한국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이런 대형 문화사업이 어떻게 침략과 전쟁 속에서 성공적으로 이뤄졌을까. 첫째, 국난이 오히려 국가 역량을 결집시키는 계기가 됐을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해상세력이 강했던 고려답게 육지는 몰라도 바다를 통한 물류는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관청리에서 출토된 고려 막새기와 실제로 발굴 유물에서는 강진과 부안에서 생산된 명품 청자, 그리고 제주도산 말과 귤이 보인다. 이것들은 강도 귀족층의 애용품이었는데, 전쟁 중에도 해상 물류에 큰 지장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강화가 고구려 시대에는 ‘혈구현(穴口縣)’으로, 조선시대에는 ‘나라의 심장’이란 뜻인 심도(心島)로 불렸는데, 이는 물류가 '흘러오는 곳'으로 풀이된다. 월곶돈대 한쪽에 세워진 시비(연미조범·燕尾曹帆)에도 ‘천 척의 배(삼남 지방에서 올라오던 조운선)가 보였다’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 역시 허황된 과장이 아닐 것이다. 외성을 그렇듯 길게 쌓은 것도 이곳 연안 물류의 종착지를 철통 방어하기 위한 것임을 보여준다. 강화의 이런 전략적인 이점이 거의 40년 동안 몽골군에 항전하면서도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만들 수 있었던 바탕이 됐다. 관청리 일대에서 진행 중인 고려시대 건물지 발굴 광경. 한국문화유산연구원 강화, 세계유산으로 나아가야 강화는 우리 역사 속에서 유독 곡절이 깊다. 고려시대 왕의 도시였지만, 고려 무신들에 의해 이곳으로 끌려온 왕도 있었고, 이곳에서 죽임을 당한 왕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선대왕의 묘(廟)를 강화에 모셨고, 왕의 행차를 위한 이궁도 설치했다. 조선 연산군과 광해군은 이곳으로 유배를 왔고, 철종은 이곳 용흥궁에서 살다가 왕이 됐다. 개경과 한양이라는 두 왕도에서 멀지 않은 큰 섬이라 영화로움과 고난이 끊임없이 교차했고, 국제 외교적으로도 극적인 장면이 펼쳐진 무대 중 하나였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민족의 미래전략에 귀감이 되는 많은 스토리들이 잠재하고 있는 곳이다. 관청리에서 출토된 상감청자 분. 한국문화유산연구원 제공 그런데 오늘날 강화의 모습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고려 왕성의 핵심구역들이 ‘개발’에 의해 훼손되고 있다. 그나마 강화도 해안을 따라 늘어선 돈대들은 잘 보존돼 있지만, 정작 고려 궁성의 자취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병란 속에서도 세계 최고의 문화를 만들어낸 고려 강도의 유적조사를 '임시 발굴' 수준인 구제발굴에만 맡길 일은 아니다. 다른 역사 고도처럼 장기적 보존 전략을 하루 속히 수립해 당시 왕궁의 모습이 조속히 드러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세계유산으로 가는 바르고 빠른 길이다. 김포 덕포진에서 석양이 비치는 염하 위에 떠 있는 강화섬을 건너 바라보면서 곱씹는 생각이다.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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